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북한의 기습 남침 == [[파일:6.25전쟁당시북한군vs한국군.jpg|width=100%]] ||<-4> 개전 당시 남북한 지상전 병력 현황 (단위 : 명) || ||<-2> 국군 ||<-2> 인민군 || || 부대명 || 병력 || 부대명 || 병력 || || [[제1보병사단|1사단]] || 9,715 || 1사단 || 11,000 || || [[제2보병사단|2사단]] || 7,910 || 2사단 || 10,838 || || [[제3보병사단|3사단]] || 7,059 || 3사단 || 11,000 || || - || - || 4사단 || 11,000 || || [[제5보병사단|5사단]] || 7, 276 || 5사단 || 11,000 || || [[제6보병사단|6사단]] || 9,112 || 6사단 || 11,000 || || [[제7보병사단|7사단]] || 9,698 || 7사단[* 7월 5일 12사단으로 개명] || 12,000 || || [[제8기동사단|8사단]] || 6,866 || - || - || ||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경비사령부]] || 7,061 || - || - || || - || - || 10사단 || 6,000 || || - || - || 13사단 || 6,000 || || - || - || 15사단 || 11,000 || || - || - || 766 독립보병연대 || 3,000 || || - || - || 12 모터사이클연대 || 2,000 || || - || - || 105 기갑여단 || 6,000 || || - || - || 경비 1 여단 || 5,000 || || - || - || 경비 2 여단 || 2,600 || || - || - || 경비 3 여단 || 4,000 || || - || - || 경비 5 여단 || 3,000 || || - || - || 경비 7 여단 || 4,000 || || - || - || 1,2군 사령부 || 5,000 || || 합계 || '''64,697''' || || '''135,438''' || 과거에 출판된 책이나 자료, 각종 매체에서는 북한군이 20만, 국군이 약 10만이라고 나와있으나 그건 정규군에 편입된 비정규군까지 합친 숫자인 반면 해당 수치로 비교할 시 국군도 보조전력으로 간주하던 국립경찰 5만 명을 추가해야 하는데, 그런 자료는 거의 없다. 당시의 국립경찰은 일반적인 경찰의 이미지와고는 다르게 국군보다 카빈소총도 많고 최신 무전설비와 상당한 규모의 지프와 쓰리쿼터 같은 오프로드 차량을 보유했으며 기관총은 물론 바주카포와 폭약도 보유하고 있었기에 KAMG에선 보조전력을 간주했었다. 실제로 전쟁 전 국지전에서도 1만 명의 경찰들이 보조했었기 때문에 보조전력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해군과 공군을 제외한 숫자로 해군과 공군 전력까지 합친뒤 비정규군을 빼면 국군이 약 7~8만 가까운 숫자고, 북한군이 14~15만 정도의 숫자다. ||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14522324883_796720fc7b_h.jpg|width=100%]] || ||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양측 병력배치현황. 기호에 대한 의미는 [[단대호]] 항목을 참고. || >'''이북괴뢰불법남침'''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25일 조효부터 삼팔선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이 대거불법남침하여 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25일 정오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25일 조효 5시부터 8시 사이에 삼팔전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은 대거하여 불법남침하고 있다. 즉옹진 전면으로부터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지 전면의 괴뢰집단은 거의 동일한 시각에 행동을 개시하여 남침하여왔고 동해안에는 괴뢰집단이 선정을 이용하여 상륙을 기도하여왔으므로 전 지역에 걸쳐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격퇴, 목하전설각지역의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요격하여 긴급적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 1950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 이후 조선일보는 6월 28일을 끝으로 10월 23일까지 발간되지 않는다. 10월 23일 발간호에서 조선일보는 사장 [[방응모]]를 비롯한 다수의 임원이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되어 재발간이 미뤄졌다고 밝혔다.] 사단을 표시한 위에 X자 2개가 있는 상자의 크기가 국군이 더 크기 때문에 국군이 병력상 우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상자의 크기와 부대의 규모는 별개다. 상자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사단이 담당하는 구역이 넓다는 것. 북한의 사단을 표현한 상자의 크기가 작으면서 여러 개라는 점을 주목하자. 즉, 북한은 동일 전역에 더 많은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했다는 소리다. 사실 총 병력의 격차는 2배 정도 수준이지만 후방 사단들은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을 하느라 빠르게 전방으로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배 이상 격차가 벌어지는 곳도 있었다. 즉 방어자의 이점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김일성은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해서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고 거짓주장을 하며 헌법에 따르면 오직 내각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니 빨리 남측에 대한 역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총사령관 명의로 "지금 전쟁이냐 평화냐는 내각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전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 모두 동의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내각이 동의하면서 [[북한]]의 정권은 최종적으로 남침을 확정하였다. 불과 한시간 후인 새벽 4시, "폭풍224"(폭풍)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하나, 그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할 때 독일의 죄수 몇 명한테 폴란드군 군복을 입혀서 독일 국경에서 알짱거리게 하는 [[자작극]]을 벌이고 그 자작극을 토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김일성도 독일처럼 자작극을 벌이고 그것을 명분으로 침공했다는 설도 있다.]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사단의 경우 전력의 대부분이 외박, 아니면 휴가였다. 38선상에서의 연이은 무력충돌과 전쟁 발발설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당시 군은 직전까지 장기간동안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술한 대규모 출타도 이로 인한 병력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전투력 회복 차원에서 조치되었던 대규모 휴가이지만 아무리 병사들의 피로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대규모로 휴가를 내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기간을 두고 소수의 인원을 순환적으로 휴가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참작하기엔 무리가 있는 셈. 한편 이 건에 대해서는 역으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항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시각도 있다.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침략의사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1950년 6월 25일. 농번기에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위화도 회군|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남한을 '''단 2개월 만에 밀어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삼팔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의 계산에 의해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므로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6월 25일과 가장 비슷한 시점에 전쟁을 일으킨 사례가 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배신하며 [[독소전쟁]]을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에 일으켰던 것. 본래 독일의 계획은 빠르면 9~10월, 아무리 늦어도 11월까진 모스크바를 비롯해서 우랄산맥 서부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주로 말에 의존하는 보급과 러시아의 환절기 기후로 지연되었고 모스크바 육박전을 할 때 [[겨울]]이 되는 바람에, 월동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독일군[*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은 3-4개월이면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 땅은 히틀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었고, 모스크바 육박전을 할 때에는 이미 러시아의 한겨울인 [[11월]]이었다. 동계장비를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이 전쟁을 말아먹었던 원인이다.]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비 부족으로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게 되어 1942년 봄까지 소련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는 방어전을 펼치는 전술로 일관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한편 소련은 이 시간동안 미국의 지원과 자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와 노동 생산력을 기반으로 독일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정비할 수 있었고 소련의 이 전력이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정예부대들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이 날짜가 진짜 절묘했던 게 1950년 6월 달력이다. ||<-7> '''1950년''' [br] '''6월''' || || {{{#FF0000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0000FF 토}}} || || || || || || 1 || 2 || {{{#0000FF 3}}} || || {{{#FF0000 4}}} || 5 || 6 || 7 || 8 || 9 || {{{#0000FF 10}}} || || {{{#FF0000 11}}} || 12 || 13 || 14 || 15 || 16 || {{{#0000FF 17}}} || || {{{#FF0000 18}}} || 19 || 20 || 21 || 22 || 23 || {{{#0000FF 24}}} || || '''{{{#FF0000 25}}}''' || 26 || 27 || 28 || 29 || 30 || || 이날이 바로 [[일요일]]이었다는 점인데 이게 뭘 의미하냐 하면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는 그 요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중 가장 방어가 허술한 요일이기도 해서 개전일로 택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날이 된다. 실제로도 각 부대 지휘관들조차 일요일에는 육본에 있는 장교클럽으로 내려와서 연회를 즐기기까지 했다. 평일이었더라면 평소처럼 병력이 주둔지에 그대로 다 있었기 때문에 바로 맞붙었으면 되었겠으나 하필 휴일인 탓에 병력들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부대가 비어 있어서 병력들에게 비상소집령을 내려야만 했고 그러는 동안 북한군을 막는 중요한 시기를 놓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